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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절과 민족의 정체성, 그리고 기독교 신앙의 원천

전 성결대 학장 노재화 목사

 

단군신화의 신학적 의미와 기독교 창조신앙에 연관지어, 역사·신화·신앙을 함께 조망하는 인문·신학적 담론을 가설로서 제기하고자 한다.

개천절, 하늘이 열린 날, 하늘의 뜻을 다시 묻다.

“하늘이 열린 날”을 신학적 사유로 보고자 한다. 10월 3일, 개천절(開天節)은 한국 민족의 시작을 상징하는 날이다. 하늘이 열리고, 사람이 그 하늘의 뜻을 받아 땅 위에 나라를 세운 날로 배워 왔다. 그러나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면, “하늘이 열린다”는 이 표현은 단군신화의 신비를 넘어 인류 보편의 창조 신앙, 곧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여시고, 인간을 그분의 형상으로 지으셨다”는 성경의 근원적이야기와도 깊은 내연관계가 있지 않을까에 의문을 갖기 시작한다.

그런데 개천절을 둘러싼 논의는 단순히 ‘언제 건국했는가’라는 사실 문제를 넘어선다. 왜 우리는 특정한 신화적 서사를 기념해야 하는가? 그 신화가 우리 민족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며, 오늘의 정체성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 그리고 동시에 우리에게 신학적 질문을 던져 본다. “우리가 믿는 하늘은 누구의 하늘인가?” “하늘이 열린다는 것은 단지 민족의 신화인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하늘의 뜻을 보여 주신 계시인가?” 이 글은 단군신화의 상징과 민족의 정체성을 살펴보고, 그 신화의 근저에 흐르는 ‘하늘과 인간의 만남’이라는 주제를 기독교 신앙의 원천과 연결시켜 새롭게 조명하고자 한다. 

첫째로 단군신화의 내용과 상징에서 “하늘이 땅에 임하다”라는 단군신화는 『삼국유사』와『제왕운기』에 기록된, 하늘의 신 환인(桓因)의 아들 환웅(桓雄)이 인간 세상에 내려와 세상을 다스리고, 곰에서 사람으로 변한 웅녀와 결혼하여 단군왕검을 낳고 고조선을 세웠다는 이야기다.

이 신화의 핵심은 하늘과 인간의 결합, 즉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의 만남이다. 환웅은 하늘에서 내려온 존재이며, 웅녀는 땅의 피조물을 상징한다. 그 둘의 결합으로 태어난 단군은 하늘의 뜻을 받아 땅 위에 질서를 세운 존재로 묘사된다. 환웅과 인간 사회를 잇는 매개로서, 하늘과 땅, 인간과 신성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장면을 담고 있다. 즉 생명의 기원, 세상 질서의 구축, 인간 존재의 정당성 등이 이 서사 속에 함축적으로 담겨 있다.

또한, 단군신화는 창조신화적 요소와 건국신화적 요소가 융합된 복합서사로 해석된다. 여기서 “하늘이 열렸다”는 개천(開天)의 의미는 ‘신의 뜻이 인간 세상에 임했다’는 초월적 상징을 품고 있다. 이는 성경의 창조 이야기, 즉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와 맞닿아 있지 않을까? 성경에서 하늘은 하나님의 거처이자 인간이 하나님과 교통하는 영역이다.

하늘이 열리는 것은 곧 하나님과 인간이 소통하는 사건이며, 그분의 뜻이 인간 역사 속으로 들어오는 구속의 시작이다. 단군신화의 ‘하늘이 열림’ 또한, 그 상징적 의미에서 하나님이 창조 때 인간에게 주신 ‘하늘의 질서’와 ‘도덕의 법’을 그리워하는 인류 보편의 종교적 그리움으로 읽을 수 있다고 생각된다. 즉 하늘의 뜻에서 땅 위에 통치를 열고, 인간과 신의 경계를 넘나드는 신성한 존재의 중재자 역할을 수행하며, 우리는 그 자손으로서 민족의 조상이 정당성을 부여받는 구조를 지닌다.

둘째로 개천절의 제정과 민족 정체성에서 볼 때에 “우리는 하늘에서 났다”는 개천절이 공식 국경일로 제정된 것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이다. 그러나 그 이전, 일제 강점기 시절에도 개천절은 독립운동가들과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우리 민족의 뿌리를 되찾는 날”로 기념되었다. 그들은 단군신화를 통해 “우리 민족은 하늘에서 났다”는 자긍심을 되살리고자 했다. 이러한 정체성 회복운동은 억압받은 민족의 자존을 일깨웠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개천절의 제도화는 민족 중심적 신앙화의 위험을 내포하기도 했다. 하늘의 뜻이 민족의 신화로만 한정될 때, 그 하늘은 하나님이 아니라 민족의 상징으로 축소되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은 민족을 초월한 하나님을 고백한다. “그는 모든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 가운데서 사람들을 사서 하나님께 드리셨다”(계 5:9).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하늘의 개천(開天)”은 민족적 자부심 이전에 하나님의 구원의 문이 열린 사건을 상징이 아닐까? 

셋째로 신화의 영성에서 보자. 인간 안에 남은 창조의 흔적 기독교 신앙의 관점에서 신화는 단순한 허구가 아니다. 신화는 인간 내면에 남은 창조의 흔적, 신의 흔적(vestigia Dei) 을 표현한 문화적 언어다. 로마서 1:20은 이렇게 말한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즉,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지음받았기에, 그 마음 깊은 곳에는 창조주를 향한 그리움이 새겨져 있다.

단군신화 속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의 이야기는, 그리움을 신화적 언어로 표현한 흔적이라 할 수 있다. 신화는 인간의 영혼이 ‘잃어버린 하나님’을 본능적으로 찾는 표현이며, 그리스도 신앙은 그 신화적 갈망의 완성이다. 신화가 하늘의 닫힘을 열려는 인간의 시도라면, 복음은 하나님께서 친히 하늘을 여시고 우리에게 오신 사건이다. 

넷째로 단군신화와 창세기의 신학적 대비를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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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교는 단군신화가 성경의 진리를 왜곡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불완전한 그림자로 읽힐 수 있음을 보여준다. C.S. 루이스는 그리스 신화를 “복음의 예비적 그림자”라 했는데, 단군신화도 마찬가지로 “하늘을 향한 인류의 기억”이라 할 수 있다. 

다섯째로 민족의 신앙과 기독교의 신앙과의 관련지어
(1) 단군신앙의 민족적 성격에서 단군신화는 오랜 세월 민족의 통합과 자긍심의 상징이었다. 특히 일제 강점기에는 “우리는 하늘의 자손”이라는 구호가 억압받은 민족을 하나로 묶는 신앙적 힘이 되었다. 그러나 단군민족주의는 내부적으로 여러 비판을 받아왔다. 우선, 지나치게 혈연적·생물학적 민족주의로 흐를 위험성, 둘째로 역사적 근거가 부족한 신화를 과장하거나 상징 이상으로 사실처럼 사용 • 민족 내부의 다양성과 차이를 포괄하기 어려움, 셋재로 민족 정체성을 고정된 뿌리 위에 세우려는 경직성 등이다. 예컨대, 어떤 학자는 단군신화가 “혈연적 민족주의보다 강조하는 것은 민족을 넘어 인류 보편적 차원으로 나아갈 수 있는 확장성과 소통성”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단군신앙이 민족 중심주의로 변질되면, 앞서 언급한 대로 ‘하늘’은 민족신(神)으로 축소되고, 하나님 대신 조상을 숭배하는 형태로 왜곡된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가 경계한 우상화의 위험이다. 성경은 말한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 20:3)에서 처럼…

(2) 기독교 신앙의 보편성에서 볼 때에 기독교는 민족의 뿌리를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그 뿌리 위에 서서, 모든 민족의 하나님을 고백한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한 민족의 하나님이었으나, 그 믿음을 통해 “천하 만민이 복을 얻는”(창 12:3) 길을 여셨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민족은 하나가 된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이 말씀은 우리에게 단군의 후예로서의 정체성을 넘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일깨우기 충분하다. 

여섯째로 개천절 신앙의 재해석이다.
“하늘이 열린다”는 복음 기독교적으로 볼 때, 개천절의 “하늘이 열림”은 복음의 예표적 상징이다. 하늘이 열렸다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단절이 회복된 사건, 곧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예시한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오심을 보시더니”(마 3:16). 이 사건은 새로운 개천절이다. 예수의 세례는 하늘과 땅이 다시 만나는 순간이며, 잃어버린 창조 질서의 회복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은 다시 열리고, 모든 민족이 하나님의 나라 안으로 초대하게 된다. 현대 사회에서는 하나의 민족 정체성만으로는 복합성을 담아내기 어렵다. 우리는 동시에 지역 정체성, 세대 정체성, 문화적 정체성을 중첩하여 산다.

단군신화와 개천절을 재해석할 때, 이를 ‘원형적 뿌리’로 삼되, 동시에 열린 해석과 상징 재구성이 필요하다. 즉 정체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갱신되고 다층화될 수 있어야 하고, 복음의 개천은 인류를 향해 열린다.

마지막 신앙적 결론으로는 “하늘의 뜻을 땅에 이루소서” 우리가 개천절을 기념할 때, 단군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하늘의 뜻’ 곧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생각해야 한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주기도문은 이렇게 고백한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것이 진정한 개천의 의미다. 하늘의 법이 땅에 임하고, 하나님의 뜻이 인간의 삶 속에 이루어지는 것. 즉, 우리 민족의 정체성은 하늘에서 왔다. 그러나 그 하늘은 단군의 하늘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의 하늘이다. 그분은 이 땅의 민족을 사랑하시되, 동시에 모든 민족을 품으시는 하나님이시다. 

결론적으로 새로운 개천의 날을 바라보며 개천절은 민족의 기원이자 영적 사유의 날이다. 하늘이 열렸다는 말은 지금도 유효하다. 그 하늘은 하나님이 열어 주신 구원의 문이며, 그 문을 통해 우리는 참된 정체성을 회복한다. 오늘의 한국 교회는 민족의 신화 위에 서 있지 않다. 그러나 민족의 기억 위에 복음의 빛을 비추어, 우리의 뿌리를 새롭게 해석할 책임이 있다. “하늘이 열린다”는 말은, 이 땅의 신앙이 다시 하늘을 바라보는 회복의 신호다. 우리의 역사는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 이해될 때, 비로소 참된 정체성을 얻게 된다. 따라서 개천절은 단군의 신화를 기념하는 날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복음적 개천절로 회복되어야 할 것이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 8:7).

우리는 단군신화를 무비판적으로 맹목 따라야 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신화와 역사의 경계를 이해하며, 그 안에 담긴 상징적 의미를 재해석하고 계승하는 태도가 더욱 중요하다. 하늘이 열린 날을 기억하는 개천절, 하늘과 땅을 잇는 존재로서 우리의 조상 이야기, 그것은 오늘 우리 자신에게 묻는 질문이다. “우리는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 그 질문 위에서 개천절은 단순한 과거의 기념이 아니라 미래 공동체로 나아가는 사유의 장이 될 것이다.

가설에서 언급한 대로 하늘이 열린 날, 그 하늘의 뜻이 우리의 민족과 교회 위에, 그리고 각 사람의 삶 속에 다시 임하기를 소망하면서, ‘하늘이 열린 날’의 영적 상징성을 함께 엮어, “하나님 중심의 정체성 회복”이라는 결론으로 나가보고자 한다.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인가? 아님 비약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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