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론
“어느 관점으로 살 것인가?”
- K굿뉴스
- 입력
황현조 목사
IRUS 변증학, 역사신학 교수
커넷티컷비전교회 담임
사람은 제각기 어떤 관점을 가지고 살아간다. 여러가지 관점들이 있겠지만, 신앙적인 면에서 말하자면 크게 두가지로 나누인다. 하나는 신적인 관점이요 다른 하나는 인간적인 관점이다. 전자를 수직적 관점이라 한다면 후자를 수평적 관점이라 할 수 있다.
이 둘 중에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좋아하는 것은 수평적 관점이다. 수직적으로 신적인 절대 진리에는 관심이 덜 한 반면, 사람 중심의 수평적 의견과 주장에 더 솔깃하고 그것에 따르는 경향이 강한 것이 오늘날의 사람들이다.
오늘날 일반 소셜 미팅에 가서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십계명 제1계명인 “하나님 유일신 신앙”이나 “예수님만이 오직 구원의 길이요 진리”라는 수직적인 관점을 공개적으로 표명했다가는 “극우파 근본주의자” “보수 꼴통”으로 비난받기가 쉽상이다. 현대는 절대적인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것 보다는, 상대주의(Relativism), 종교 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이 사람들에게 더 인기있게 들려지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이 비방하는 “극우파 근본주의자”라는 말도 그렇다. 원래 기독교 근본주의(Christian Fundamentalism)란 기독교 신앙의 척추와 같은 다섯가지 근본 교리인 “성경 무오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구원, 예수님의 부활, 예수님의 재림”을 수호하는 신학이요 운동을 말한다. 이 운동이 생긴 이유는, 19세기 말부터 근대 인본적 이성주의 철학과 자유주의 신학이 집중적으로 기독교의 근본 교리들을 공격하여 기독교의 기반을 흔들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에 대항하여 기독교의 근본 신앙을 파수하기 위해 “기독교 근본주의” 신학과 신앙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초자연적 근본 교리를 믿지 않는 리버럴한 미디어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이러한 “기독교 근본주의” 운동을 폄하하고, 심지어는 폭력적 “이슬람 극우 근본주의” 같은 것으로 동급 취급하고 있다.
만약 기독교가 근본 교리를 상실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기독교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 교인이 기독교 근본 교리를 의심하여 믿지 않는다면 참다운 신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다운 신자는 모두 “기독교 근본주의자”가 되어야 함이 마땅하다. 그것은 결코 수치스럽다거가 외부로부터 비난받아야 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기독교 근본 교리를 믿지 않으면서 교인 행세를 한다면 가짜 교인으로 부끄러운 일이고 하나님의 책망을 받을 일이다. 참다운 기독 신자는 언제나 흔들림 없이 근본적인 교리를 빼놓지 않고 믿으며 살아야 한다. 그 사람이 곧 성경적인 수직적 신앙을 가진 신자이다.
현대 인류학이나 사회학에서 한 사회와 종족의 문화를 연구할 때 일반적으로 수평문화와 수직문화로 나눈다. 수평문화를 표면문화로, 수직문화를 뿌리문화로 부르기도 한다. 이 두 종류의 문화를 바다의 파도와 비교해 보자. 고요한 바다에 외부의 폭풍이 불어오면 심한 파도가 치기 시작한다. 그 폭풍에 움직이는 파도는 주로 표면에 있는 물이다. 그러나 바다 속 깊이 있는 물은 외부의 폭풍이 몰아쳐도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한 인간과 사회도 마찬가지다. 수평문화에 젖은 인간과 사회는 인생의 외풍이 불어오면 바다 표면의 물처럼 파도치며 심하게 움직인다. 자신의 신념이나 가치관이 쉬이 요동된다. 반면에 수직문화에 젖은 인간과 사회는 바다 속 깊이 있는 물처럼 인생의 외풍이 몰아쳐도 주관과 신념이 잘 흔들리지 않는다. 그것은 이른바 외골수 고집이나 아집과는 성질이 다르다. 수평문화에 젖은 사람은 요동하는 세상 환경의 지배를 받고 살지만, 수직문화에 젖은 사람은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고 내부적 주관과 신념으로 살아간다는 말이다.
참다운 기독 신자는 세속 문화의 파도에 흔들리지 않는 수직문화에 젖은 사람과 같다. 외부의 풍랑에 흔들리지 않는 깊은 물과 같은 사람이다. 아무리 외풍이 세어도 수직적인 굳건한 신앙과 삶의 푯대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삶의 태도와 방식에 있어서도 수직적 관점의 사람과 수평적 관점의 사람은 서로 다르다. 가령 두 사람이 열심히 일을 하는데, 한 사람은 일에 성공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도와 사회에 유익한 일들을 하기 위하여 한다. 다른 한 사람은 그것보다 자기 명예와 물질의 축적에 더 큰 관심을 두고서 한다. 전자는 수직적 관점의 삶이요, 후자는 수평적 관점의 삶이다. 이 두사람은 동일한 시간을 동일한 장소에서 보내지만 그들이 보내는 시간의 가치와 내용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오늘날 유대인들은 어떻게 보면 고생을 사서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21세기에 살면서도 외풍에 잘 흔들리지 않는다. 물론 그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수용하지 않는 것은 잘못되었다. 세속적 유대주의에 속한 유대인들의 자기중심적 이기심으로 많은 문제를 파생시켜 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정통파 유대인들이 고생이 되어도 그들 나름대로 힘껏 신본주의적인 수직 신앙을 지켜온 삶의 태도만큼은 높게 평가돼야 할 것이다. 국내외를 통틀어 이천만도 안 되는 조그만 약소 민족에게서 세계 노벨상 수상자의 삼분의 일이 나왔다는 사실을 한갖 우연으로 돌릴 수 있을까? 수평문화가 범람하는 현대 사회에서 그들이 그토록 수직문화와 수직신앙을 고수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 그들 민족의 저력이 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오늘날과 같이 여러가지 가치관이 홍수와 같이 밀려와서 혼잡한 시대에 우리는 어떤 관점을 선택하여 살아야 할 것인가? 우리는 지혜로운 선택을 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인 성경의 교훈을 따르는 수직적인 인생관을 선택해야 않겠는가? 거세게 밀려오는 수평문화의 파도를 잘 헤쳐 나가는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 그렇게 수직적 인생관을 선택한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반면에,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기 중심의 수평적 인생관을 선택한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어느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현재와 영원”의 행로가 엄청나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만복의 근원이신 여호와 하나님은 현명한 선택자에게 현세와 내세의 영원한 축복을 분명히 약속하셨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을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로마서 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