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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의 소리] 성도가 세우는 ‘바른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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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05-11 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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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 고발 프로그램이 유행하던 때가 있었다. 믿고 먹던 음식, 소문난 맛집, 믿고 소비했던 물품의 진실이 하나하나 벗겨질 때마다 시청자들이 공분했다. 어떤 식당들은 이 프로그램 때문에 망했다고 하지만 꼭 그런 건 아니다. “이 식당 가지 마세요” “이 제품 구매하지 마세요”가 아니라 소비자 스스로 착한 식당, 좋은 제품을 판별해서 불량품이 사라지고 착하고 바른 것들이 가득 찬 사회로 만드는 게 이 프로그램의 최종 목표였다. 실제로 소비자가 똑똑해지자 건강하고 착한 물품과 식당은 오히려 빛을 보기 시작했다. 그 프로그램 덕에 나같이 미련한 사람도 한 번 더 생각하고 구매하는 습관이 생겼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이런 일이 교회에도 있었다. 16세기 종교개혁 역사가 바로 그런 것 아닐까. 불량 교회와 불량 신학을 고발하고 그 자리에 착하고 바른 교회를 세우는 것이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의 종교개혁이다. 그 최종 목표는 신자 스스로 똑똑해져 불량 교회와 불량 성직자를 퇴출하고 착하고 바른 교회, 착하고 바른 목사, 착하고 바른 신학을 이 땅에 구현하는 데 있었다.

신학 이야기 하나 해보자. 종교개혁의 배경이 되는 중세는 위계가 뚜렷한 사회였다. 하지만 루터는 성서(예: 벧전 2:9, 계 5:10 등)를 통해 “세례 받은 사람은 모두 평등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섬기는 제사장으로 부름받았다”는 ‘만인 제사장직’과 ‘직업 소명론’을 설파했다. 이제껏 세상은 서열로 구분되고 교회 일은 거룩하고 세속 직업은 열등하다고 가르치고 배웠는데 개혁자는 이렇게 가르치는 교회와 신학은 ‘불량 교회’ ‘불량 신학’이라고 고발한다. 그러고는 그 자리에 복음의 가치를 중심으로 누구나 거침없이 소통하며 서로의 직무를 존중하는 사회가 세워지길 꿈꿨다. 개혁자들이 설명하는 만인 제사장직은 위계나 방종의 자유 대신 조화와 질서 안에서 이뤄지는 존중의 관계를 강조한다.

무슨 말인가. 더 쉽게 풀어보자. 수타 우동 전문점에 갔다. 난 소비자이니 함부로 주방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그저 저 멋진 고깔모자 주방장의 솜씨를 믿고 기다린다. 만인 평등사상을 외치며 주방으로 들어가 밀가루 반죽을 주물거릴 바보는 없다. 그런 손님이라면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하다. 드디어 음식이 나왔다. 그런데 우동이 이상하다. 탱글탱글해야 할 면발이 입천장에 달라붙고 면발이 갈라진다. 이건 수타 우동 전문점이라는 간판 이름과 다르다. 수타 면발이 아니라 분명 냉동됐거나 삶은 지 오래된 게 분명하다.

이런 경우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똑똑한 소비자라면 일단 소비자고발 프로그램에서 배운 계몽된 지식으로 의심한다. 그다음 조용히 나가든지 아니면 주방장이나 사장을 불러 대응을 하든지 그것은 각자의 성품에 달려 있다. 분명한 것은 다음부터 이 가게엔 안 간다는 사실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종교개혁은 교회 고발 프로그램이다. 게다가 개혁교회는 착한 가게 바른 교회의 간판을 달고 나온 교회다. 그런데 이곳 음식이 불량품이라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그냥 꾸역꾸역 아무 말 없이 먹고 또 먹고 다음에도 또다시 그 음식을 먹으러 갈 것인가. 그곳 사장님이야 손님 떨어지지 않아 좋을지 몰라도 당신은 조만간 탈 나고 말 것이다. 사장 불러 놓고 불량 음식 호통칠 자신 없으면 그냥 조용히 다음부터 그곳 음식 안 먹으면 된다. 그게 몸에도 영혼에도 현명한 길이다.

개신교의 정신은 이 땅에 불량품 교회, 불량품 신학, 불량품 목사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건강하고 바른 교회와 신학, 바른 정신의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나라를 일구길 꿈꾸는 것이다. 소비자가 똑똑해져야 하듯 신자 스스로 똑똑해져야 한다. 이것이 종교개혁이라는 ‘프로테스탄트’ 정신이다.

최주훈 중앙루터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