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소금] 쿠르드 난민의 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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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진 수니파 무장 세력인 이슬람국가(IS)의 공격을 피해 시리아에서 접경국 레바논으로 피신한 난민이 120만명에 달한다. 이들 중 상당수는 과거 ‘로마의 빵 바구니’로 불리던 레바논 곡창지대 베카주 일대에서 소작농 등으로 일하며 생계를 유지한다.
쿠르드족 출신의 난민 술레이만씨 가족도 이런 부류다. 지난달 한 선교단체를 따라나선 탐방길에 크리스천이 된 술레이만씨 집에서 하룻밤 묵는 기회를 얻었다. 난민 가정 숙박 체험을 요청한 게 아니라 이들 가정의 초대에 응한 것이었다.
가장인 술레이만의 이름은 솔로몬의 이슬람식 이름이다.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이름인데 내 앞에 서 있던 40대 초반의 그는 훌러덩 벗겨진 머리에 헤진 내복 차림으로 손님을 맞이했다. 이가 다 드러날 정도로 환한 미소와 함께. 그 뒤로는 아내 야스민씨와 두 딸이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스윽 둘러본 집안 내부는 허름한 상가 창고 같았다. 거실 겸 안방이나 마찬가지인 실내 한가운데엔 난로가 놓여 있었다. 그 주위로 ㄷ자 형태의 기다란 매트리스가 깔려 있었다. 세간은 모두 낡았다. 화장실에는 손바닥보다 작은 크기의 깨진 거울이 비누곽 앞에 세워져 있었다.
술레이만씨 부부는 밝고 온화했다. 통역을 맡은 선교사를 사이에 두고 이런저런 농담에 신앙을 갖게 된 간증까지 들었다. 오간 말 중 가장 기억에 남았던 건 잠자리에 들기 전 아내 야스민씨가 꺼낸 얘기다. “우리 형편을 안다. 하지만 이렇게 와줘서 너무 기쁘다.” 그러고 나서 이들 가족과 함께 난로를 가운데 두고 가로 세로로 누워서 잠을 청했다. 이튿날 아침,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쳐다보며 “메리 크리스마스”로 아침 인사를 나눴다. 이상하게 하나도 낯설지 않았다.
그날 저녁, 우리 일행은 또 다른 쿠르드 난민 무라드씨 집에 들렀다. 겉모습은 60대 중반인 그는 이제 막 불혹에 접어든 사내였다. 자녀는 6명. 아내의 배 속에 한 명이 더 있다고 했다. 트랙터로 땅 주인의 밭일을 도우며 가족을 먹여살리고 있었다. 비닐하우스 같은 그의 집에 들어섰을 때 고양이가 집 안에서 쥐를 쫓고 있었다.
무라드씨 부부는 아랑곳없이 손짓과 몸짓을 섞어 손님들을 맞이하고 안내했다. 함께 음식을 나누고 얘기를 나누는 중에 이들이 자못 뿌듯해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동행한 한인 선교사는 “무라드씨 부부가 손님을 맞이한 걸 너무 자랑스러워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사실 전날 이 집을 들렀어야 했는데, 다른 일행의 사정으로 방문이 무산됐었다. 그런데도 선교사는 일부러 약속을 다시 잡았다. 이들 문화가 누구를 집에 초대하는 일을 대단한 영광으로 여긴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라드씨 부부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세심한 배려였다.
시종 무릎을 꿇은 채 손님을 대하는 무라드씨의 모습은 동방예의지국에서 온 방문객에게도 잔잔한 감동을 선사했다. ‘환대’는 반갑게 맞아 정성껏 후하게 대접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하지만 술레이만씨나 무라드씨 집에 들렀을 때 젓가락을 들지 않고도, 포만감이 없어도 건하게 대접받은 느낌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환대(Hospitality)의 라틴어 어원인 ‘호스페스(Hospes)’에서 대략 감을 잡았다. 호스페스는 ‘주인(Host)’과 ‘손님(Guest)’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함께 지니고 있다. 난민 가정에서 대접받은 것은 손님을 주인처럼 여기는 마음 씀씀이였다. 누추하지만 그들의 공간을 낯선 이에게 선뜻 내어주고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열어보이는 그들의 문화 속에서 새삼 도전을 받는다.
이틀 뒤면 실내에서도 마스크를 벗는다. 지난해 봄 거리두기 해제에 이어 엔데믹 시대로 또 한 발짝 나아간다. 문득 만면의 미소로 어서 들어오라며 손짓하는 술레이만씨의 따뜻한 환대가 떠오른다. 마스크를 벗고 누구라도 초대하고 초대받는 환대의 봄날을 기다린다.
박재찬 종교부장 jeep@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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